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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주 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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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공주 루이즈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넷째 딸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조각가로 활동했다. 1871년 아가일 공작의 상속자인 로언 후작과 결혼하여 캐나다 총독 부인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하며, 앨버타 주의 명명에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켄싱턴 궁전에서 지내며,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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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주 루이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81년 촬영된 루이즈 공주
1881년 촬영된 루이즈 공주
본명루이자 캐럴라인 앨버타
출생1848년 3월 18일
출생 장소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사망1939년 12월 3일
사망 장소영국 런던 켄싱턴 궁전
배우자제9대 아가일 공작 존 캠벨 (1871년 결혼, 1914년 사별)
아버지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앨버트
어머니빅토리아 여왕
서명
작위
공주영국
아가일 공작 부인영국
왕가
가문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1917년까지)
장례
매장일1939년 12월 12일
매장 장소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왕실 지하 납골당
캐나다 총독 배우자
임기 시작1878년 11월 25일
임기 종료1883년 10월 23일
군주빅토리아 여왕
총독론의 후작 존 캠벨
이전해리엇 로완-해밀턴
이후모드 해밀턴

2. 어린 시절

루이즈는 1848년 3월 18일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났다.[3]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의 넷째 딸이자 여섯 번째 자녀였다. 그녀의 출생은 유럽 전역을 휩쓴 1848년 혁명과 일치했고, 여왕은 루이즈가 "무언가 특이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란츠 크사버 윈터할터의 원본을 바탕으로 빅토리아 여왕이 그린 루이즈 공주의 초상화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루이즈의 이름을 '루이저 캐롤라인 앨버타'로 지었다. 그녀는 1848년 5월 13일 버킹엄 궁전의 개인 예배당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존 버드 섬너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에서는 루이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평생 루이즈로 알려졌다.[3] 그녀의 대부모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구스타프 빌헬름(앨버트 공이 대리인으로 참석), 작센마이닝겐 여공작 마리 프레데리카(아델라이드 여왕이 대리인으로 참석), 캠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캠브리지 여공작 아우구스타가 대리인으로 참석)였다.[3] 세례식 동안 글로스터 공작부인 메리는 조지 3세의 몇 안 되는 생존한 자녀 중 한 명이었는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고 갑자기 예배 도중에 일어나 여왕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여왕을 몹시 당황하게 했다.

루이즈는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인 앨버트 공과 그의 친구이자 측근인 스톡마르 남작이 고안한 엄격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양육되었다. 어린 아이들은 요리, 농업, 가사, 목공과 같은 실용적인 과제를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루이즈는 재능 있고 지적인 아이였으며, 예술적 재능은 빠르게 인정받았다. 1863년 오스본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아들인 할람 테니슨은 루이즈가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왕족 신분 때문에 예술 경력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은 처음에는 조각가 메리 손이크로프트의 지도 아래 미술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고, 나중(1863년)에는 현재 왕립 미술 대학인 국립 미술 훈련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루이즈는 또한 유능한 무용수가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은 춤을 춘 후 루이즈가 "다른 자매들보다 더 활력과 정확성으로 스코틀랜드 검무를 췄다"고 썼다. 그녀의 재치와 지성은 그녀를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했고, 호기심 많은 성격은 왕족 구성원들로부터 "작은 미스 와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3. 비서로서의 역할

루이즈는 1861년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이 사망한 후,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비공식 비서 역할을 맡았다. 1866년 언니 헬레나 공주가 결혼한 후 이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여왕은 루이즈가 부주의할 것을 우려했다.[4]

하지만 루이즈는 비서 업무에 능숙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루이즈에 대해 "훌륭하고 강한 성격, 이타적이고 애정이 넘치는 영리한 귀여운 소녀"라고 칭찬했다.[4] 루이즈는 여왕을 대신해 편지를 쓰고 정치적 서신을 처리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1867년 새로운 어린이 북동부 병원 개원,[5] 1869년 HMS ''드루이드''호 진수 등 공공 및 자선 활동에도 참여했다.

4. 결혼

루이즈는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20세에 국립 예술 학교에 진학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딸을 위해 좋은 사윗감을 찾기 시작했다. 웨일스 공비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오빠인 덴마크 왕세자 프레데리크(후일 프레데리크 8세)를 제안했지만, 여왕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프로이센과 덴마크가 다투는 상황을 우려해 반대했다. 장녀 빅토리아는 남편의 사촌인 알브레히트 왕자를 추천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국내 귀족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 군주의 딸이 신하와 결혼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왕세자는 반대했다.

1865년, 루이즈


빅토리아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아가일 공작의 후계자인 로언 후작 존을 선택했다. 아가일 공작 부부와 여왕은 이 결혼에 합의했고, 로언 후작은 결혼 전에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다. 루이즈와 로언 후작은 1871년 3월 21일 윈저 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78년, 로언 후작은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부는 캐나다로 떠났다. 루이즈 공주는 캐나다에서 인기가 많았고, 캐나다 국내는 물론 이웃 나라인 미국까지 방문했다. 루이즈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는데, 유화수채화 모두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그녀가 사과꽃 그림을 그린 문은 리도 홀(캐나다 총독 관저)에 지금도 남아 있다.

1880년 2월, 루이즈는 오타와에서 넘어져 중상을 입었다. 완쾌 후 영국으로 귀국했고, 2년 동안 영국에 머물렀다. 루이즈는 토론토 종합 병원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환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1900년, 로언 후작은 제9대 아가일 공작이 되었고, 191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루이즈는 제1차 세계 대전프랑스에 파견된 캐나다 군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어 프로그모어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가일 공작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학자들은 루이즈가 10대에 앓았던 뇌막염 때문에 불임이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아가일 공작의 성적 취향과 루이즈가 차가운 기후를 이유로 자주 캐나다를 떠났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기도 한다.

4. 1. 구혼자들

루이즈 공주는 당대와 현대의 전기 작가들이 모두 여왕의 가장 아름다운 딸로 여겼을 만큼 매력적인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언론으로부터 근거 없는 염문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여왕은 루이즈의 자유주의와 페미니즘적 성향을 고려하여 그녀에게 적합한 남편감을 찾고자 했다. 여왕은 사윗감이 루이즈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적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전의 사위처럼 자신의 곁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덴마크 왕세자와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공자, 오렌지 공 윌리엄등이 구혼자로 거론되었으나, 여왕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덴마크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고, 프로이센 왕자는 영국에서 인기가 없었으며, 오렌지 공은 파리에서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인해 모두 거절했다.

루이즈와 로른의 약혼 사진(W & D Downey, 1870)


루이즈는 왕자와의 결혼을 원치 않았고, 아길 공작의 상속자인 로른 후작 존 캠벨과의 결혼을 원했다. 1515년 서포크 공작 찰스 브랜든과 메리 튜더의 결혼 이후, 군주의 딸과 영국인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에, 왕세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반대했다. 특히 로른의 아버지인 조지 캠벨이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열렬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는 그가 왕족을 정치적 분쟁에 끌어들일까 우려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1869년 왕세자에게 편지를 보내 반대를 무마했다. 여왕은 편지에서 시대가 변했으며, 루이즈가 백성과 결혼하는 것이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유럽 왕자들이 서로 혈연관계로 얽혀있어 왕족의 도덕적, 육체적 강화를 위해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루이즈는 1870년 10월 3일 발모럴 방문 중 로언 후작과 약혼했다.[1] 로언은 스코틀랜드의 발모럴 성에 초대되었으며, 루이즈, 대법관, 해더리 남작과 빅토리아 여왕의 시녀 레이디 엘리와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그날 늦게 루이즈는 돌아와 여왕에게 로언이 루이즈에게 "헌신을 이야기했다"고 알렸고, 여왕의 승인을 알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7]

여왕은 딸을 떠나보내는 것을 어려워하며, 일기에 "그녀를 잃는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7] 새로운 왕실 전통의 위반은, 특히 독일에서 놀라움을 자아냈고, 빅토리아 여왕은 프로이센 여왕에게 가난한 작은 독일 가문의 왕자들이 영국에서 "인기가 없"으며, "독립적인 재산"을 가진 "국내 저명인사"인 로언 경은 "독일의 작은 왕족보다 실제로 계급이 낮지 않다"고 썼다.[8]

빅토리아는 루이즈의 결혼 직전에 루이즈에게 연금을 정했다.[9] 결혼식은 1871년 3월 21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으며,[2] 밖의 인파가 너무 많아 경찰관들이 통제를 위해 처음으로 체인 장벽을 형성해야 했다. 루이즈는 자신이 디자인한 호니턴 레이스로 된 웨딩 베일을 착용했고, 어머니, 두 맏형인 웨일스 공, 에든버러 공작의 호위를 받으며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영국 공주 루이즈의 웨딩 드레스

4. 2. 로언 후작과의 결혼

루이즈는 왕자와의 결혼을 원치 않았고, 아길 공작령의 상속자인 로른 후작(아길 공작령) 존 캠벨과의 결혼을 원한다고 발표했다. 1515년 서포크 공작 찰스 브랜든이 메리 튜더(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와 결혼한 이후, 군주의 딸과 영국인 간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루이즈의 맏이인 웨일스 공은 비중재 귀족과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다. 더욱이 로른의 아버지인 조지 캠벨은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웨일스 공은 그가 왕족을 정치적 분쟁으로 끌어들일까 걱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는 1869년 웨일스 공에게 편지를 쓴 여왕에 의해 무너졌다.

빅토리아 여왕은 루이즈가 백성과 결혼하는 것이 가족에게 "새로운 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모든 유럽 왕자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왕은 이것이 왕족을 도덕적, 육체적으로 강화할 것이라고 확신했다.[8]

루이즈는 1870년 10월 3일 발모럴 방문 중 로언 후작과 약혼했다.[1] 로언은 스코틀랜드의 발모럴 성에 초대되었으며, 루이즈, 대법관, 해더리 남작과 빅토리아 여왕의 시녀 레이디 엘리와 함께 드라이브를 했다. 그날 늦게 루이즈는 돌아와 여왕에게 로언이 루이즈에게 "헌신을 이야기했다"고 알렸고, 여왕의 승인을 알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7]

빅토리아 여왕은 루이즈의 결혼 직전에 루이즈에게 연금을 정했다.[9] 결혼식은 1871년 3월 21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거행되었으며,[2] 루이즈는 자신이 디자인한 호니턴 레이스로 된 웨딩 베일을 착용했고, 어머니, 두 맏형인 웨일스 공, 에든버러 공작의 호위를 받으며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부부는 그 후 신혼여행을 위해 서리 주의 클레어몬트로 여행했지만, 여행 중과 식사 시간에 수행원의 존재로 인해 사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5. 캐나다 총독 부인 시절

1878년, 영국 총리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로언을 캐나다 총독으로 지명했고, 빅토리아 여왕이 그를 정식으로 임명했다.[13] 이에 루이즈는 부총독 배우자가 되었다. 부총독 배우자로서 루이즈는 예술, 고등 교육, 여성 평등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활용했지만, "가정 경제 문제는 모든 진정한 여성의 - 최고의 삶의 근본에 놓여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즈의 캐나다 생활은 향수병, 오타와에 대한 혐오, 심각한 썰매 사고로 순탄치 않았다.

1879년 캐나다 의회 개회식에서 루이즈 공주와 함께 있는 로언 후작


루이즈가 캐나다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가장 아끼던 여동생 앨리스가 1878년 12월 14일에 사망하여 슬픔으로 가득했다. 루이즈는 첫 크리스마스에 향수병을 겪었지만, 곧 겨울 썰매스케이트를 즐겼다. 1879년 2월 13일 캐나다 의회 개회에서 캐나다 국왕의 직계 대표인 로언이 항상 아내보다 우선순위를 가졌기 때문에, 루이즈는 다른 참석자들과 마찬가지로 로언이 의원들에게 앉으라고 요청할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19]

로언은 모든 캐나다 국회의원을 만나기 위해 2주마다 50명을 위한 만찬을 열었다. 일부 캐나다 여성들은 영국 측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궁정 연회는 개방적이었으며, 행사에 참석할 옷을 살 여유가 있는 사람은 방문자 명부에 서명만 하면 되었다.[21] 1879년 2월 19일, 루이즈의 첫 번째 공식 무도회가 열렸는데, 루이즈는 부총독 일행과 손님들을 구분하는 실크 끈을 제거하도록 지시하여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 무도회는 술에 취한 악사가 가스등에 커튼을 잡아당겨 화재가 발생할 뻔하는 등 여러 사고로 얼룩졌다.[21]

루이즈의 조각 작품 중 하나는 현재 맥길 대학교 스트라스코나 음악 건물인 로열 빅토리아 칼리지 앞에 서 있는 빅토리아 여왕 동상이다.[22]

1880년 2월, 루이즈는 오타와에서 썰매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썰매 사고와 버뮤다 방문" 섹션 참조) 이 사고로 루이즈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로언은 1883년까지 캐나다에 머물렀다.

루이즈는 토론토 종합 병원을 단독으로, 또는 남편이나 형제와 함께 세 번 방문했으며, 방문할 때마다 병원 방문객 기록부에 "루이즈"라고만 서명했다.

5. 1. 캐나다 생활

1878년 11월 15일, 루이즈 공주 부부는 리버풀을 출발하여 11월 25일 핼리팩스에서 취임식을 위해 캐나다에 도착했다.[14]

캐나다의 루이즈 공주


루이즈는 리도 홀에 거주한 최초의 왕족이 되었는데, 이곳은 오타와에 있는 여왕의 공식 왕실 거처였다. 그러나 리도 홀은 영국의 왕실 거처와는 달리 화려하지 않았고, 각 부총독 부부가 자신들의 가구로 홀을 장식하고 떠날 때 가져갔기 때문에 로르네 부부는 도착했을 때 궁전이 장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이즈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홀 주변에 수채화와 유화 그림을 많이 걸고, 조각 작품도 설치했다. 여왕의 딸이 캐나다의 부총독 부인이 될 것이라는 소식에 "도미니언에 기쁨이 터져 나왔다"고 전해졌고, 공주가 캐나다인과 그들의 군주 사이의 강력한 연결 고리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15] 그러나 새로운 총독과 그의 부인의 도착은 캐나다 언론으로부터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는데, 이는 왕족을 그동안 왕족이 아닌 사회에 강요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16]

로르네의 개인 비서인 프랜시스 드 윈턴이 네 명의 언론인을 왕실 열차에서 내리게 하면서 언론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로르네 부부는 드 윈턴의 행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언론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추측했고, 그들은 초기에 거만하다는 평판을 얻었다.[17] 루이즈는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경악했고, 부총독 법원에서 "쫄따구 국가"에 대한 보고와 "뒷걸음질" 수업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담요 코트(capote)를 입고 와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14] (여기서 '담요 코트'는 흔한 ''카포트''를 가리킨다.) 결국 리도 홀의 엄격한 법정에 대한 우려와 "미미한 비판의 흐름"은 왕족 부부가 그들의 전임자들보다 더 편안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18]

루이즈가 캐나다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가장 아끼던 여동생인 앨리스가 1878년 12월 14일에 사망하여 슬픔으로 얼룩졌다. 첫 크리스마스에 향수병을 겪었지만, 루이즈는 곧 겨울 기후에 익숙해졌다. 썰매 타기와 스케이트 타기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취미였다. 캐나다에서 국왕의 직계 대표인 로언은 항상 아내보다 우선순위를 가졌기 때문에, 1879년 2월 13일 캐나다 의회 개회에서 루이즈는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로언이 의원들에게 앉으라고 요청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서 있어야 했다.[19] 로언이 모든 캐나다 국회의원을 만나기 위해 그는 2주마다 50명을 위한 만찬을 열었다. 그러나 캐나다 여성 중 일부는 영국 측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시녀 중 한 명은 "어떤 대화를 시작할 때 '나는 당신만큼 훌륭하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고했다.[20] 궁정 연회는 개방적이었으며, 행사에 참석할 옷을 살 여유가 있는 사람은 방문자 명부에 서명하기만 하면 되었다.[21] 루이즈의 첫 번째 공식 무도회는 1879년 2월 19일에 열렸으며, 그녀는 부총독 일행과 손님들을 구분하는 실크 끈을 제거하도록 지시했을 때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무도회는 술에 취한 악사가 가스등에 커튼을 잡아당겨 화재가 발생할 뻔하는 등 여러 사고로 얼룩졌다.[21] 개방형 관행은 다른 손님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손님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한 참석자는 참석자의 식료품 상인이 같은 세트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21]

그녀의 조각 작품 중 하나는 현재 맥길 대학교의 스트라스코나 음악 건물인 로열 빅토리아 칼리지(Royal Victoria College, Montreal) 앞에 서 있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다.[22] 로언의 아버지인 아가일 공작은 6월에 두 딸과 함께 도착했고,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루이즈는 약 12.70kg의 연어를 잡았다.[23] 여성들의 낚시 성공에 공작은 캐나다에서의 낚시는 기술이 필요 없다고 언급했다.[23]

1880년 2월, 루이즈는 오타와의 길에서 넘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들은 빅토리아 여왕은 걱정과 딸의 부주의로 화를 냈다. 루이즈는 완쾌되자 총독직을 맡고 있는 남편을 두고 영국으로 귀국했고, 그것은 2년이나 걸렸다.

루이즈는 토론토 종합 병원을 단독으로, 또는 남편이나 형제와 함께 방문한 적이 3번 있었다. 어느 때나 병원 방문객 기록부에 간단하게 "루이즈"라고만 서명했다.

5. 2. 썰매 사고와 버뮤다 방문

루이즈와 로언, 그리고 두 명의 수행원은 1880년 2월 14일 썰매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15] 그 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마차가 뒤집히면서 마부와 하인이 썰매에서 튕겨져 나갔다. 그 후 말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뒤집힌 마차를 약 365.76m 이상 끌고 다녔다. 루이즈는 지붕을 지탱하는 쇠막대에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잃었고, 로언은 그녀 밑에 갇혀 "마차 옆면이 곧 부서질 것"이라고 예상했다.[15][16] 결국 그들이 앞서 가던 썰매를 따라잡았을 때 말들이 진정되었고, 그 썰매에 타고 있던 루이즈 공주의 부관이 부상자들을 리도 홀로 데려다 줄 빈 마차를 요청했다.

루이즈를 진찰한 의사들은 그녀가 심한 뇌진탕과 쇼크 상태에 있으며 "그녀의 두개골이 골절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보고했다. 루이즈의 귀걸이가 썰매 옆면에 걸려 귓불이 두 조각으로 찢어지면서 귀에 부상을 입었다. 언론은 로언의 개인 비서의 지시에 따라 이 사건을 축소 보도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어리석고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묘사했다.[16] 예를 들어, 뉴질랜드의 한 신문은 "타격을 입은 직후를 제외하고 공주는 그동안 완전히 의식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루이즈의 실제 상태를 알게 되었다면 캐나다 국민들의 동정을 샀을지도 모르지만, 한 국회의원은 "귀 아랫부분에 난 상처를 제외하면 언급할 만한 부상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따라서 루이즈가 즉각적인 약속을 취소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사고 소식은 영국과 걱정하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축소 보도되었다. 루이즈 공주는 1881년 남편이 1883년까지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캐나다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그녀는 영국 해외 영토인 버뮤다의 초기 관광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버뮤다는 노바스코샤에서 770nmi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1883년,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겨울을 버뮤다에서 보냈는데 (1883년 1월 29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호를 타고 도착), 부유한 북미인들이 겨울철에 버뮤다의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찾아가는 유행을 대중화시켰다. 그녀의 방문은 버뮤다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1885년에 문을 연 호화로운 호텔은 이러한 새로운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프린세스 호텔은 해밀턴 항구, 버뮤다의 해안, 버뮤다, 펨브로크 교구에 건설되었다(루이즈 공주는 방문 동안 페이짓 교구의 JH 티밍햄의 집인 ''잉글우드''에 머물렀다).[17][18][19][20][21][22]

5. 3. 캐나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루이즈는 1883년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캐나다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졌다. 1885년 노스웨스트 반란 동안, 루이즈는 보이드 박사에게 의료 물품과 지원금 명목으로 많은 돈을 보냈다. 그녀는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차별 없이 지원을 제공하라는 명시적인 지시를 내렸다.[23] 그녀의 지시에 따라 보이드는 토머스 로딕 박사 휘하의 민병대 의료진과 함께 피시 크릭 전투와 바토슈 전투 현장에 동행하여 부상자, 특히 메티스 반대 세력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24]

1905년, 앨버타 주는 루이즈 캐롤라인 앨버타 공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앨버타 주 내의 루이즈 호와 앨버타 산 또한 그녀의 이름을 기려 명명되었다.[23][24]

6. 빅토리아 여왕의 말년

루이즈가 나이가 들자 빅토리아 여왕은 딸을 위해 좋은 사위를 찾기 시작했다. 덴마크 왕세자 프레데리크(후일 프레데리크 8세)가 후보로 제안되었으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프로이센과 덴마크 간의 갈등이 있었기에 여왕은 반대했다.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는 알브레히트 왕자를 추천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최종적으로 루이즈를 영국 국내 귀족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 군주의 딸이 신하와 결혼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왕세자 앨버트 에드워드는 반대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아가일 공작의 후계자인 로언 후작 존을 선택했다. 1871년 3월 21일 윈저 성에서 루이즈와 로언 후작은 결혼했다. 1878년, 로언 후작은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부부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루이즈는 캐나다에서 인기가 많았으며,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다. 작가이자 조각가였으며, 유화수채화 모두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그녀가 사과꽃 그림을 그린 문은 리도 홀(캐나다 총독 관저)에 남아 있다.

1880년 2월, 루이즈는 오타와에서 넘어져 중상을 입었다. 회복 후 영국으로 귀국했고, 2년 동안 영국에 머물렀다.

1900년, 로언 후작은 제9대 아가일 공작을 습작했다. 1914년 아가일 공작이 폐렴으로 사망한 후, 루이즈는 제1차 세계 대전프랑스에 파견된 캐나다 군을 방문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프로그모어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가일 공작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학자들은 루이즈가 10대에 앓았던 뇌막염 때문에 불임이었다고 추정한다.

6. 1. 가족과의 갈등

루이즈는 1883년 10월 27일 남편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25] 빅토리아 여왕은 그들에게 켄싱턴 궁전에 아파트를 주었고, 부부는 루이즈가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루이즈는 영국에서 공무를 다시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1884년 7월 1일에 블룸즈버리의 세인트 조지 가든을 개장했다.[25] 남편 로는 1885년에 햄스테드 의석을 얻기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1895년에 사우스 맨체스터 의석을 얻어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루이즈는 로 및 그의 아버지와 달리 아일랜드 자치법을 지지했고, 그가 글래드스토니안 자유주의에서 자유 연합당으로 탈당했을 때 실망했다.[26] 루이즈와 로 사이의 관계는 나빠졌고, 여왕이 그들을 한 지붕 아래에 두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종 각자의 길을 갔다.[26] 그가 루이즈와 동행했을 때조차 그는 항상 궁정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고, 웨일스 공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왕족 중에서 로는 영국 하원에서 글래드스토니안 자유주의 자유당으로 한 정당과 밀접하게 관련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루이즈와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두 자매인 비아트리체와 헬레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비아트리체는 1885년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질투심이 많은 루이즈는 여왕이 그녀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비아트리체를 동정하는 데 익숙해졌다. 비아트리체의 전기 작가인 매튜 데니슨은 비아트리체와 달리 루이즈는 40대에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루이즈와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가까이 지내지 않았고, 로의 동성애 혐의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26] 따라서 비아트리체는 인기 있는 남편과의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즐기고 있었지만, 루이즈는 그렇지 못했다. 루이즈는 하인리히 공자를 자신에게 더 적합한 남편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확실히, 하인리히 공자가 1896년에 사망한 후 루이즈는 "그 [하인리히]는 내가 가진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그리워한다"고 썼다. 게다가 루이즈는 고인이 된 형님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이 그의 측근이었고 비아트리체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발표했다.

6. 2. 루이즈에 대한 소문

루이즈는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두 자매인 비아트리체와 헬레나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비아트리체는 1885년 키 크고 잘생긴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질투심이 많은 루이즈는 여왕이 비아트리체를 항상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녀를 동정하는 데 익숙해졌다.[26] 비아트리체의 전기 작가인 매튜 데니슨은 비아트리체와 달리 루이즈는 40대에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26] 루이즈와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가까이 지내지 않았고, 남편 로의 동성애 혐의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26] 비아트리체는 인기 있는 남편과의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즐기고 있었지만, 루이즈는 그렇지 못했다.[26] 루이즈는 하인리히 공자를 자신에게 더 적합한 남편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26]

1865년 말부터 1866년 중반까지 왕실은 150명의 스코틀랜드 퓨질리어의 경호를 받았다. 공식적으로 이는 페니안의 위협으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상류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루이즈가 오빠 레오폴드의 가정교사인 월터 스털링과 임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27][28] 루이즈의 전기 작가인 루신다 혹슬리에 따르면, 루이즈의 아들 헨리는 1866년에 태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왕의 변호사들이 그녀의 거처로 소환되었다. 여왕의 산부인과 의사인 프레데릭 로콕과 그의 아내는 회의 직후 헨리라는 아들을 입양했다.[28] 그 소년은 다른 왕족 아이들과 함께 자랐고 자신이 루이즈의 아이였다고 주장했다. 헨리의 후손들은 DNA 검사를 승인했지만, 법원은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결했다.[29]

루이즈가 여왕의 부관 비서관인 아서 비지(나중의 스탬퍼드햄 경)와 불륜 관계에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비어트리체는 여왕의 주치의에게 이 소문을 언급하며 "스캔들"이라고 불렀고,[26] 헨리 왕자는 만찬에서 비지가 루이즈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26] 루이즈는 이 소문이 비어트리체와 헬레나가 궁정에서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부인했다.[26]

불륜에 대한 소문은 비지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1890년 조각가인 조지프 에드거 뵈임 경이 런던의 자신의 작업실에서 루이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자, 둘이 불륜 관계였다는 소문이 돌았다.[30] 역사가 루신다 혹슬리에 따르면, 둘은 오랜 사랑을 나눴다.[30]

6. 3.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왕족으로서의 루이즈

루이즈는 궁정의 일원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원했다. 해외 여행 시 그녀는 종종 "캠벨 부인"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1] 루이즈는 하인들에 대한 자선으로 유명했다. 한번은 집사가 그녀에게 늦게 일어난 시종을 해고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그녀는 시종에게 알람 시계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고, 집사는 이미 알람 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루이즈는 특정 시간에 그를 침대에서 내던지는 침대를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가 아플지도 모른다고 제안했고, 확인 결과 그는 결핵에 걸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하여 시종은 요양을 위해 뉴질랜드로 보내졌다.[2]

또 다른 경우로, 버뮤다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리셉션에 초대되어 차를 타는 대신 걸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 한 집에 들러 맥카시 부인이라는 흑인 여성에게 물 한 잔을 요청했다.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여성은 물을 얻기 위해 약간의 거리를 가야 했지만, 다림질을 끝내야 했기에 망설였다. 루이즈가 다림질을 계속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 여성은 거절하며 루이즈 공주를 보러 가기 위해 서둘러 일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루이즈는 맥카시 부인이 그녀를 다시 알아볼 수 있을지 물었다. 그 여성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자, 루이즈는 "자, 내 모습을 잘 봐두세요. 내일 세인트 조지에서 나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이라고 답했다.[3] 공주는 사생활을 고수하며,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즐겼다.[4]

루이즈와 그녀의 자매들은 여왕의 가까운 친구인 제인 스펜서, 처칠 남작부인의 사망 이후 또 다른 불화를 겪었다. 어머니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결심한 루이즈는 그 소식을 여왕에게 점진적으로 전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루이즈는 헬레나와 비아트리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5] 한 달 후인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과 국장(Death and state funeral of Queen Victoria)이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에서 일어났다.[6] 유언장에서 여왕은 오스본 영지에 있는 켄트 하우스를 루이즈에게 별장으로 유증했고,[7] 오스본 코티지를 루이즈의 막내 여동생 비아트리스에게 주었다. 루이즈와 비아트리스는 이제 켄싱턴 궁전과 오스본에서 이웃이 되었다.[8]

7. 말년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언니인 비아트리체 공주 옆 방을 사용했다. 1925년 11월 11일 화이트홀의 전몰자 추모비 등 왕족들과 함께 가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5년에는 조지 5세와 그의 부인 메리 여왕을 켄싱턴 타운 홀에서 열린 실버 주빌리 축하 행사에서 맞이했으며, 켄싱턴 자치구의 명예 자유시민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공식 석상은 1937년 홈 아트 앤 인더스트리 전시회였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증손자인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12월 11일에 퇴위했다. 1936년 12월 루이즈는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에게 위기에 대해 그에게 동정을 표하는 편지를 썼다.[1]

조지 6세가 즉위한 후,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져 켄싱턴 궁에 갇히게 되었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는 이곳을 "이모 궁전"이라고 불렀다.[2] 팔에 신경염, 갈비뼈 사이의 신경 염증, 기절 발작, 좌골 신경통을 앓았다. 루이즈는 기도를 초안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그 중 하나는 네빌 체임벌린에게 보내졌고, "우리 국가의 장관과 우리를 다스리는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소서..."라고 적혀 있었다.[3]

1900년 4월 24일, 제8대 아가일 공작이 사망하면서 남편 존 캠벨은 제9대 아가일 공작이 되었다. 아가일 공작은 1914년에 폐렴으로 먼저 사망했다. 루이즈는 제1차 세계 대전프랑스에 파견된 캐나다 군을 방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 12월,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해는 프로그모어의 왕실 묘지에 잠든 부모 곁에 매장되었다.

아가일 공작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학자 중 한 명에 따르면 루이즈는 10대에 앓았던 뇌막염 때문에 불임이었다고 한다. 또한, 많은 루이즈의 전기에서는 아가일 공작 자신이 남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루이즈가 차가운 기후를 이유로 종종 오랫동안 캐나다를 떠났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7. 1. 에드워드 시대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 이후, 루이즈는 오빠인 에드워드 7세의 사교계에 참여했다. 그는 흡연을 포함하여 루이즈와 공통점이 많았다. 그녀는 신체 건강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비웃음을 사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보다 오래 살 거예요."라고 응수하곤 했다.[31] 1900년부터 아가일 공작 9세가 된 루이즈의 남편은 귀족원에서 자리를 잡았다. 식민부 장관(Colonial Secretary) 조지프 체임벌린은 그해 그에게 오스트레일리아 총독 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루이즈는 조각을 계속했으며, 1902년에는 보어 전쟁에서 사망한 식민지 군인들을 위한 기념비를 설계했다. 같은 해, 그녀는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 리치먼드 경이 제안한 기혼 여성의 누드 스터디를 시작했다.

루이즈는 켄트 하우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남편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자주 방문했다. 로언이 공작이 되었을 때도 재정적인 압박은 사라지지 않았고, 루이즈는 부부가 절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버라레이에 국왕을 초대하는 것을 피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로언이 아가일 공작이 되기 전에 그 집을 방문했을 때, 70명의 하인과 74마리의 개가 있었다.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할 무렵에는 하인 4명과 개 2마리만 있었다.

7. 2. 마지막 해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언니인 비아트리체 공주 옆 방을 사용했다. 1925년 11월 11일 화이트홀의 전몰자 추모비 등 왕족들과 함께 가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5년에는 조지 5세와 그의 부인 메리 여왕을 켄싱턴 타운 홀에서 열린 실버 주빌리 축하 행사에서 맞이했으며, 켄싱턴 자치구의 명예 자유시민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공식 석상은 1937년 홈 아트 앤 인더스트리 전시회였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증손자인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12월 11일에 퇴위했다. 1936년 12월 루이즈는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에게 위기에 대해 그에게 동정을 표하는 편지를 썼다.[1]

조지 6세가 즉위한 후,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져 켄싱턴 궁에 갇히게 되었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는 이곳을 애정을 담아 "이모 궁전"이라고 불렀다.[2] 그녀는 팔에 신경염, 갈비뼈 사이의 신경 염증, 기절 발작, 좌골 신경통을 앓았다. 루이즈는 기도를 초안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그 중 하나는 네빌 체임벌린에게 보내졌고, "우리 국가의 장관과 우리를 다스리는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소서..."라고 적혀 있었다.[3]

1900년 4월 24일, 제8대 아가일 공작이 사망하면서 로언 후작 존은 제9대 아가일 공작을 습작했다. 아가일 공작은 아내 루이즈보다 먼저 1914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미망인이 된 루이즈는 제1차 세계 대전프랑스에 파견된 캐나다 군을 방문했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 12월에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91세의 장수를 누렸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해는 프로그모어의 왕실 묘지에 잠든 부모 곁에 매장되었다.

아가일 공작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학자 중 한 명에 따르면 루이즈는 10대에 앓았던 뇌막염 때문에 불임이었다고 한다. 또한, 많은 루이즈의 전기에서는 아가일 공작 자신이 남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루이즈가 차가운 기후를 이유로 종종 오랫동안 캐나다를 떠났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8. 죽음

루이즈 공주는 1939년 12월 3일 아침 켄싱턴 궁전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33] 약 70년 전에 착용했던 결혼 베일을 쓰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간소하게 장례를 치른 후, 그녀의 유해는 1939년 12월 8일 골더스 그린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1939년 12월 12일, 많은 영국 왕족과 아가일 가문 구성원이 참석한 가운데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로열 볼트에 조용히 안치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1940년 3월 13일 윈저 근처의 프로그모어 로열 장지로 옮겨졌다. 루이즈의 유언장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사망할 경우 남편 옆인 킬문의 캠벨 영묘에, 잉글랜드에서 사망할 경우 부모님 근처인 프로그모어에 묻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그녀의 관은 그녀의 연대인 아가일 서더랜드 하이랜더의 8명의 부사관이 운반했다.[34] 그녀의 유산은 239260GBP 18실링 6펜스로 확정되었으며, 그녀의 부채에는 담배 15실링이 포함되어 있었다.[35]

프로그모어에 있는 루이즈 공주의 묘 (가운데), 로열 장지

9. 유산

루이즈는 자신의 이름을 딴 네 개의 캐나다 연대를 두었다.

연대명위치
캐나다 아가일 앤 서덜랜드 하이랜더 연대(프린세스 루이즈)온타리오주 해밀턴
프린세스 루이즈 드래군 가드온타리오주 오타와
제8 캐나다 후사르 연대(프린세스 루이즈)뉴브런즈윅주 몬턴
프린세스 루이즈 푸실리어 연대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



캐나다 앨버타 주는 원래 "루이즈"라는 이름으로 계획되었으나, 루이즈 공주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자신의 세례명 중 마지막 이름을 선택하여 앨버타로 명명되었다. 앨버타주의 루이즈 호수와 앨버타 산 또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6]

루이즈는 가족과의 관계가 대체로 돈독했다. 여왕, 여동생 헬레나, 베아트리스와 가끔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동안 남동생 아서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에드워드 7세 국왕이 가장 좋아하는 여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형제자매 중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앨리스 공주와 가장 가까웠으며, 그들이 사망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36] 루이즈가 가장 아낀 친척은 조카손자 조지와 그의 아내 마리나였다.[36]

1939년 12월, 루이즈는 켄싱턴 궁전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해는 프로그모어의 왕실 묘지에 잠든 부모 곁에 매장되었다.

9. 1. 예술 활동

루이즈는 유화수채화 모두에 능숙한 예술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녀는 캐나다 총독 관저인 리도 홀에 사과꽃 그림을 그린 문을 남겼으며, 토론토 종합 병원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루이즈"라고 서명하기도 했다.[36]

9. 1. 1. 대표작

루이즈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훈련을 받았다. 1864년에는 수잔 듀란트에게, 1867년에는 메리 손이크로프트에게, 그리고 조지프 에드가 뵘 경에게 추가 수업을 받았다.[36] 또한 국립 예술 훈련 학교에 다녔다. 19세기의 많은 여성 예술가들처럼, 루이즈는 순수 예술가보다는 산업 디자이너와 미술 교사를 위한 훈련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성 미술 학생들과 달리 누드 모델을 대상으로 한 훈련은 없었다.

루이즈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들 중 예술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으며, 다작의 예술가이자 조각가였다. 루이즈가 대관식 복장을 한 여왕의 동상을 조각했을 때, 언론은 그녀의 스승인 에드가 뵘 경이 이 작품의 진정한 창작자라고 주장했다. 루이즈의 친구들은 그녀의 노력과 독립성을 강조하며 이 주장을 부인했다. 이 작품은 1887년에 전시될 예정이었지만, 제작이 1893년까지 지연되었다. 그녀의 형제이자 매형인 바텐베르크의 헨리 왕자 기념비와 제2차 보어 전쟁에서 전사한 식민지 군인 기념비가 와이트 섬의 위핑엄 교회에 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또 다른 동상은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교에 있고,[37] 리치필드 대성당 북쪽에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있다.[37]

루이즈의 빅토리아 여왕 동상 (켄싱턴 궁전)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들의 유모인 메리 앤 서스턴의 무덤에 있는 루이즈의 조각상

10. 작위, 경칭, 영예 및 문장

루이즈 공주는 다양한 작위, 경칭, 영예 및 문장을 수여받았다.

영예
1865년 1월 21일: 로열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훈장 여성 수훈자(1등급)[43]
1878년 1월 1일: 인도 제국 훈장 동반 기사[44]
1885년 8월 7일: 로열 레드 크로스 회원[45]
1904년 2월 10일: 에드워드 7세 왕가 훈장
1911년 6월 3일: 조지 5세 왕가 훈장
1918년 6월 3일: 대영 제국 훈장 여성 최고 지휘관[46]
1926년 6월 12일: 성 요한 훈장 여성 최고 지휘관[47]
1937년 5월 11일: 로열 빅토리아 훈장 여성 최고 지휘관[48]
1866년 1월 8일: 포르투갈 왕국pt 여왕 성 이사벨 훈장 여성 수훈자[49]



명예 군사 임명
1911년 7월 3일: 제5 공주 루이즈 드래군 가드 명예 연대장 (1936년 제4 공주 루이즈 드래군 가드로 변경)
1913년: 켄싱턴 연대 (공주 루이즈 연대) 사령관
1914년 6월 22일: 아길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 (공주 루이즈 연대) 사령관
1930년 4월 15일: 캐나다 아길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 (공주 루이즈 연대) 사령관
1936년 8월 14일: 공주 루이즈 퓨질리어 사령관



루이즈 공주는 1871년부터 여성 교육 연합 회장을 맡았고,[50] 1872년부터 1939년까지 걸스 데이 스쿨 트러스트의 후원자를 맡았으며,[50] 1923년부터 1939년까지 왕립 해난 구조 협회, 레이디스 라이프보트 길드의 후원자를 역임했다.[50]

1858년, 루이즈 공주는 왕실 문장 사용을 허가받았으며, 작은 방패에는 작센 방패가, 분류표는 세 개의 점이 있는 은색으로 표시되었다. 루이즈의 문장에서는 바깥쪽 점에 빨간색 칸톤이, 가운데에는 빨간색 장미가 그려졌다. 1917년, 조지 5세의 왕실 칙령에 따라 작은 방패는 제거되었다.[51]

문장 (1858–1917)
왕실 모노그램


10. 1. 작위 및 경칭


  • 1848년 3월 18일 – 1871년 3월 21일: 루이즈 공주 전하
  • 1871년 3월 21일 – 1900년 4월 24일: 로언 후작 부인 루이즈 공주 전하
  • 1900년 4월 24일 – 1939년 12월 3일: 아가일 공작 부인 루이즈 공주 전하[48]

10. 2. 영예

10. 2. 1. 명예 군사 임명

1911년 7월 3일: 제5 공주 루이즈 드래군 가드 명예 연대장 (1936년 제4 공주 루이즈 드래군 가드로 변경)

1913년: 켄싱턴 연대 (공주 루이즈 연대) 사령관

1914년 6월 22일: 아길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 (공주 루이즈 연대) 사령관

1930년 4월 15일: 캐나다 아길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 (공주 루이즈 연대) 사령관

1936년 8월 14일: 공주 루이즈 퓨질리어 사령관

10. 2. 2. 명예 직책

루이즈 공주는 1871년부터 여성 교육 연합 회장을 맡았다.[50] 1872년부터 1939년까지 걸스 데이 스쿨 트러스트의 후원자를 맡았으며,[50] 1923년부터 1939년까지 왕립 해난 구조 협회, 레이디스 라이프보트 길드의 후원자를 역임했다.[50]

10. 3. 문장

1858년, 루이즈와 그녀의 세 여동생들은 왕실 문장 사용을 허가받았으며, 작은 방패에는 작센 방패가, 분류표는 세 개의 점이 있는 은색으로 표시되었다. 루이즈의 문장에서는 바깥쪽 점에 빨간색 칸톤이, 가운데에는 빨간색 장미가 그려졌다. 1917년, 조지 5세의 왕실 칙령에 따라 작은 방패는 제거되었다.[51]


11. 가계도

1세2세3세4세
1. 영국 공주 루이즈2.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4.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에른스트 1세 공작8.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프란츠 프리드리히 공작
5.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즈 공녀9. 로이스-에버스도르프의 아우구스타 카롤리나 백작 부인
3.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6.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10.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투스 공작
7.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11.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즈 샤를로테 공작 부인
style="background-color: #ffc;" |12. 영국과 하노버의 조지 3세
style="background-color: #ffc;" |13.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롯 공주
style="background-color: #ffc;" |14.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프란츠 프리드리히 공작 (= 8)
style="background-color: #ffc;" |15. 로이스-에버스도르프의 아우구스타 카롤리나 백작 부인 (= 9)

[52]

참조

[1] 간행물 London Gazette 1870-10-25
[2] 간행물 London Gazette 1871-03-24
[3] 간행물 London Gazette 1848-05-17
[4] 문서 McDougall 1988, Youth (1848–1878)
[5] 웹사이트 The northern suburbs: Haggerston and Hackney Pages 505–524 Old and New London: Volume 5. Originally published by Cassell, Petter & Galpin, London, 1878. https://www.british-[...]
[6] 문서 Buckle 1926 pp=632–633
[7] 웹사이트 Queen Victoria gifted bracelet http://www.paulfrase[...] 2021-12-16
[8] 문서 Benson 1938 p=166
[9] 간행물 London Gazette 1871-03-03
[10] 웹사이트 First Floor http://www.inveraray[...]
[11] 웹사이트 Chelsea: Cremorne Gardens Pages 84–100 Old and New London: Volume 5. Originally published by Cassell, Petter & Galpin, London, 1878. https://www.british-[...]
[12] 문서 Scotland's Lost Houses by Ian Gow
[13] 간행물 London Gazette 1878-10-15
[14] 문서 Longford 1991 p=45
[15] 문서 Wake 1988 p=236
[16] 뉴스 Sleigh Accident to the Princess Louise http://paperspast.na[...] 1880-05-08
[17] 뉴스 The Capital of Bermuda; Hamilton, "The Whitest City in the World." https://timesmachine[...] 1883-01-28
[18] 뉴스 A Nest for the Princess; Bermudans Making Elaborate Preparations https://timesmachine[...] 1883-02-05
[19] 뉴스 The Bermuda Parliament; is Opened with Great Pomp and Ceremony https://timesmachine[...] 1890-04-13
[20] 뉴스 Forty Hours to Bermuda; that may be the Time Within Twenty-Four Months https://timesmachine[...] 1891-10-04
[21] 웹사이트 Fairmont Hotels & Resorts, Hotel History of the Fairmont Hamilton Princess http://www.fairmont.[...]
[22] 서적 Defence Not Defiance: A History of the Bermuda Volunteer Rifle Corps https://books.google[...] The Island Press
[23] 웹사이트 Which interesting facts about Alberta you should know https://www.albertac[...] Government of Alberta 2017-12-10
[24] 서적 Alberta Place Names: The Fascinating People & Stories Behind the Naming of Alberta https://books.google[...] Dragon Hill Publishing
[25] 웹사이트 The Harrison Estate Pages 70–79 Survey of London: Volume 24, the Parish of St Pancras Part 4: King's Cross Neighbourhood. Originally published by London County Council, London, 1952. https://www.british-[...]
[26] 서적 Victoria's Daughters https://archive.org/[...] St. Martin's Press
[27] 웹사이트 Did Queen Victoria's Daughter Have an Illegitimate Baby as a Teen? https://www.huffingt[...] 2014-08-14
[28] 웹사이트 Queen Victoria's daughter Princess Louise 'had illegitimate son with brother's tutor' https://www.telegrap[...] 2013-11-25
[29] 웹사이트 The mystery of Princess Louise's secret son https://honey.nine.c[...] 2020-07-24
[30] 문서 Lucinda Hawksley, Queen Victoria's Mysterious Daughter, Chapter 9 (St. Martin's Press, 2013)
[31] 문서 Longford 1991 p=74
[32] 문서 Longford 1991 p=77
[33] 간행물 London Gazette 1939-12-01
[34] 뉴스 The Glasgow Herald 1939-12-13
[35] 웹사이트 Queen Victoria's daughter died owing money for cigarettes https://www.bbc.com/[...] 2022-10-20
[36] 서적 Modern Scottish Women: Painters and Sculptors, 1885–1965 https://books.google[...]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37] 웹사이트 Lichfield: The cathedral Pages 47–57 A History of the County of Stafford: Volume 14, Lichfield. Originally published by Victoria County History, London, 1990. https://www.british-[...]
[38] 웹사이트 Royal Collection Trust https://www.royalcol[...] 2016-05-25
[39] 웹사이트 Royal Collection Trust https://www.royalcol[...] 2016-05-25
[40] 웹사이트 National Portrait Gallery – Portrait http://www.npg.org.u[...] 2016-05-25
[41] 웹사이트 Historic England https://historicengl[...] 2022-10-08
[42] 서적 Monuments of St Paul's Cathedral 1796–1916 Scala Arts & Heritage Publishers Ltd
[43] 웹사이트 War Memorials Register: Colonial Forces - Boer War https://www.iwm.org.[...] 2022-06-29
[44] 간행물 London Gazette 1878-01-04
[45] 간행물 London Gazette 1885-08-11
[46] 간행물 London Gazette 1918-06-04
[47] 간행물 London Gazette 1927-06-14
[48] 간행물 London Gazette 1937-05-11
[49] 논문 Agraciamentos Portugueses Aos Príncipes da Casa Saxe-Coburgo-Gota https://www.academia[...] 2019-11-28
[50] 서적 Hidden Depths: Women of the RNLI https://books.google[...] History Press Limited
[51] 웹사이트 Heraldica – British Royalty Cadency http://www.heraldica[...] Heraldica.org 2011-08-20
[52] 서적 Lines of Succession: Heraldry of the Royal Families of Europe Little,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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